레빗 주식회사 대표자의
인생 일대기
중3까지 항상 남녀공학 학교에서
남자 중에서 반에서 1등
전교 20위권을 유지했어요.
그러다가 대구에서 사립학교 중에서
가장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대륜고등학교로 학군을 옮기게 되었고,
반에서 중간 성적을 유지했어요.
그러다가 17살 고등학교 1학년 때
블로그를 처음 접하였어요.
당시에는 블로그마케팅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을 정도로
극 초기 시장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잠시 학교를 쉬는 6주간
1000만원의 순수익을 만들었고
파워블로거가 되었어요.
저는 빠르게 고등학교
자퇴를 결정했어요.
이미 머리 속에는
연 순 수익 두 자리 수를 맞출
시스템 구상이 끝나 있었고,
실행하기로 마음을 먹었었거든요.
그렇게 학교를 자퇴하기로
부모님을 설득하고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을
어머니와 함께 찾아가서
자퇴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자퇴서를 받아서 집에 왔어요.
어머니는 저를 마지막으로 설득하기
위해서 이모 댁으로 데려갔어요.
이모에게는 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두 형 다 엄청난 수재예요.
수능 4개 틀린 형이랑,
카이스트 역대 최연소 합격한
형이랑 대면을 했어요.
제가 평소에 내심 존경하고
좋아하던 형들이었거든요.
형들이 한 말에 설득이 되어서
학교를 다시 다니기로 결정했어요.
이후에 이모 댁에 와서 형들이
공부하는 걸 보고 배우기로 했어요.
형들은 공부 스타일이 중간고사에 1달 ,
기말고사에 1달만 몰아서
공부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제가 갔을 때는 밤새도록
플스로 피파를 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여기서 충격을 받았어요.
벽을 느꼈어요.
형들은 나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공부하고 훨씬 더 많이 놀지만,
어떠한 부모님의 터치도 없었어요.
대신 공부하는 1달은 방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몰입도였어요.
공부할 때 제가 옆에 갔는데
온 지도 모르더라고요.
여기서 느꼈던 게 "인생은 결과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미화된다.
사업을 포기한 기회비용이 있었기에
나름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그 시간들은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했어요.
형들과 마지막 날
표정이 시무룩해져서 돌아가려는
저에게 이모가 한 마디 해주었어요.
"혁준아, 공부 머리보다는 사업 머리다.
공부만 잘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
형들 보고 벽을 느낀
제게는 조금의 위로가 되었어요.
만약에 이때 창업을 했다면,
큰 돈을 벌었겠지만
그 돈을 지키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해요.
당시에는 그릇이 작았기 때문에
학교를 다닌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어요.
대신 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판단에 서울로,
여의도고등학교로 올라왔어요.
여의도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아버지랑 둘이서 2년을 살았어요.
서울에 온 덕분에
더 큰 세상을 볼 수가 있었어요.
친구들과 서울 사람들은
엄청 상냥했어요. 좋았어요 🙂
사업을 시작한 계기는
고3때, 자기계발 도서를 읽다가
로이터 기자의 인터뷰에서
해외 아프리카의 못 사는 시골의
어떤 아이가 많이 굶주린 상태로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까운
떨리는 손으로
꾸깃하게 적은 편지를
기자에게 주었어요.
그 편지에는 집에 있는
엄마를 향한 것이었는데,
'엄마가 보고싶어요'라는 내용이었어요.
돌아가면 엄마는 무조건
굶어 죽어있을 상황이었어요.
기자는 차마 이 사실을
아이에게 전달해 줄 수가 없었다고 해요.
그 내용을 보는데,
나는 반드시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적어도 굶어 죽는 세계에서
살아가지는 않겠다는 꿈을 가졌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계산해보니
엄청나게 많은 돈이 필요했어요.
이게 제 대의명분이었고
사업의 목표이자 목적이었어요.
그러니 이 대의명분이 실현되기 전까진
사업의 포기가 불가능한 사람인거죠.
대학을 가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놀았어요.
교수님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매일 매일 친구들과 놀러 학교로 갔어요 🙂
중&고등학교 때 제대로
한 번도 못 놀았거든요!
그리고 사업을 시작하면
못 놀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머리로는 사업 전략
구상을 계속하면서
이 짧은 여유를 즐겼어요.
그렇게 22살에 창업을 했어요.
대진대학교 산학협력단의 지원을 받아서
학교 내에 번듯한 사무실이 생겼어요.
시작 자본금 0원이었어요.
하지만, 정부와 기관이나
가족 혹은 지인을 비롯해
어떠한 형태의 지원도 일절 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날 회사를
일구어 내고 싶었어요.
우리의 시작은 1년 2개월간 매출이
0원이었어요.
프로그램 자체 개발
홈페이지 자체 제작
핵심 프로젝트의 업계 상황 큰 변화
위 3가지 항목에 집중하느라,
너무 숲을 보고 있었거든요.
자동화 수익을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도 만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핵심 프로젝트의
핵심 기술이 막혀 버렸어요.
12년만에 이 업계에 처음있는 일이었죠.
고등학생 때 시작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업이었지만,
불평하지 않았어요.
사업의 전면 재검토가
필요한 상황에 빠져버렸어요.
왕초보 사업가에게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죠.
이런 상황이 겹치면서 열심히 만든
프로그램들을 사용할 수가 없어
매출로 이어지지 못하고,
영업으로 활로를 뚫기 위해서
지금 보고 있는 큰 규모의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요.
동료들과 새벽 5시까지 일하고
사무실에서 자고
9시에 일어나서 바로 일 시작하는
생활 패턴을 가졌어요.
레빗은 항상 입주해 있던
산학협력단 건물에서
가장 늦게 불이 꺼지고,
가장 빠르게 불이 켜졌어요.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기업을 일군다는 명목 아래
가족을 포함한 외부의 지원은
일절 받지 않는다는
제 신념을 토대로 밀고 나가고 있었어요.
말 그대로 지원군이 없는
배수의 진으로 단일 전선을 꾸렸어요.
다 같이 굶어 죽던가,
활로를 찾던가. 양자택일이었죠.
시작 자본금이 0원이다 보니
회사에서 라면을 먹고
컵밥을 먹으면서 버텼어요.
라면을 먹으면서
김치가 있음에 행복해하고
조금 사정이 나아져서
컵밥을 먹어서 행복해했어요.
이후에 극한까지 갔을 때
이대로면 곧 먹을 게 다 떨어져서
저는 우리 학과 복도에 있는 정수기 물로
배를 채운 경험이 있어요.
최소한 동료들은 굶기기 싫었어요.
신기한 건 우리 회사 맞은 편에 입주한
우리 학교 출신 기업도
똑같이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한 번만 그랬었는데, 여기는 몇주째
물로 배를 채우고 있다고 했어요.
이 회사는 우리와
거의 같은 시간을 일하고 있었어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매우 큰 동질감을 느꼈어요.
나중에는 우리 회사의
큰 고객사가 되어서 힘을 보태 주셨었죠.
그러다가 한 번은 동료가
" 혁준아 니 과학자들이
왜 아사하는줄 아나? "
"왜? 배고파서?"
속으로 생각했어요.
'이제는 우리가 굶어 죽기직전까지 갔나'
"아니 너무 몰입해서
밥 먹는 걸 까먹어서다"
다행히 품격 있는
밥 먹고 일하자는 말이었어요.
이 말을 듣고 결국 제가 타협했어요.
업계 상황이 바뀌었음을 인정하고
완벽한 구축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돈부터 벌자.
첫 매출 30,000원,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 기뻤어요.
그렇게 한달 내로
모든 동료들의 월급을 세팅했고
우리는 맛있는 걸 마음껏 먹게 되었어요 🙂
저는 동료들이 먹고 싶은 걸
다 시켜 먹게 해주었어요.
회사는 항상 그랬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우리의 웃음 소리로
한 층이 도배가 될 정도였죠.
이 전 과정에서 제가 가져간
월급은 0원이였어요.
돈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었을 뿐이고,
제 목적은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나의 대의명분을
실현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연 매출 0원이었던
1년 2개월이라는 대 장정속에서
단 한 명의 동료도 생활 환경에 대한
불평을 토로하지 않았어요.
누가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조금도 힘들지 않았어요.
제가 보기엔 다들 일이 너무 즐거워서
완전히 미쳐있었거든요.
열정에 뇌가 잠식되어서
피로를 못 느끼고
빠르게 피가 순환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동료들에게서 들었던
가장 행복했던 말이
"나는 돈을 벌면 레빗 주식에
전재산을 다 쓰고 싶다"
"이런 마인드라면 성공할 수 밖에 없어"
"레빗을 생각하면 꿈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 올라요"
"여기서 일했던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다"
그런데 위기는 소리 없이 찾아 왔어요.
저는 소중했던 전 직원에게
우리는 현재 역량이 부족하니
2년 뒤에 각자 역량을 키워서
다시 만나자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이 순간이 제가 9년을 일하면서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슬펐던 날이었어요.
신기하게도 이 날 밤에 송별회 자리에서
지금의 아내에게 고백을 받았어요:)
모든 걸 잃어 가장 슬펐던 날이
가장 행복한 날로 바뀌는 순간이었죠.
이후로 다시는 내 능력 부족으로
동료를 잃지 않기 위하여
이를 악 물고 일했어요.
무조건 결과에만 집중했어요.
레빗은 연평균 성장률 100%를
매해 기록하며
꾸준히 성장을 했고
소기의 결과를 만들어냈어요.
이후에 산학협력단에서 우리 회사의
초기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셨던 분이
학교에 예비창업자들을 대상으로
강연 요청을 해 주셨어요.
당연히 아무 생각 없이 찾아 뵙고
보은을 해야 맞았지만,
연 매출 두 자리 수를
막 돌파하던 시점이었고,
아직은 초보 단계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초보인 내가 가서
책임감 없는 몇 마디의 말로
사업의 방향을 잡아주고
이 친구들을 고수로
키울 수는 없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어서 정중히 거절을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초보인
내가 왕초보에게 도움을 주는 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회사가 일정 궤도에 오른 이후에
가장 후회하는 일 일정도로
성장세는 순탄했어요.
그렇게 20대를 전부 보냈어요.
집과 회사에서 98%의 시간을 보내었고,
대인 관계는 최대한 축소했어요.
아마 이 시기에 저를
직접 본 사람이 많지 않을 거예요.
제 판단은 회사에 시간을
전부 쏟아 붓는 거였거든요.
자기자본금 0원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은 엄청나게 풍족했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가족들 지인들과
사업에 관한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어요.
행동으로 인한 결과,
사업가는 결과로 말하니까요.
그렇게 20대의 마지막 29세의 11월에
부동산 계약들을 다량 체결하고
18세에 한국과 미국 중에
한국 국적선택을 하여
가기로 결정했던 군 복무를 하러 갔고
군 복무를 잘 마쳤어요.
그리고 지금 현재 레빗은 송파에 있어요.
아무것도 없던 회사가
3년 내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누군가는 그러더라고요.
"너 가진 거 레빗밖에 없잖아?"
저는 아무 답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어요.
'나는 그게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거다'
꼭 이루어야 할 대의명분이 있으니까요.
이 대의명분을 매일 아침마다
단 하루도 잊지 않고
선언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여기까지가 제가 보낸
인생의 한 챕터예요.
다음 챕터에는
더 많은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우리의 길을 만들고
역경을 뚫고 나가고 싶네요 🙂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